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축 통화 (문단 편집) === 중세 === [[원나라]]에서는 [[교초]]라는 지폐가 사용되었다. 교초는 원나라 조정이 보유한 일정량의 은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이지만, 원나라는 방대한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들었고, 은 보유량에 관계없이 교초를 남발하다가 물가폭등을 불렀고, 경제와 정부재정이 붕괴되어 망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중국 왕조는 청나라 말기까지 약 600년간 지폐를 쓰지 않고, 은화나 동전을 썼다. 교초는 고려나 그밖의 몽골제국의 번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니 당대의 기축통화라고 할 수 있었다. 참고로 몽골 제국의 다른 방계 국가인 [[일 칸국]] 등에서도 교초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현지 상인들의 극렬한 반발로 실패하였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어음이 활용되었고 금나라 때 이미 교초가 발행된 역사가 있어 상인들이 [[지폐]]에 나름 익숙했으나, 이란인들에게 있어서 종이로 된 돈은 생소한 개념이었다. 결국 근세까지 은이 기축통화 노릇을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사용하는 [[두카트]] 화폐가 애용되었다. 두카트를 실질적인 기축 통화라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 중 하나였던 지중해 동부의 [[오스만 제국]] 경제가 두카트 주조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두카트의 가치가 하락하면, 오스만 제국 경제에도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며 [[포토시]] 은광을 개발한 것을 계기로 막대한 양의 은을 들여왔고, 때마침 스페인에서 수은-아말감 기법[* 은광석을 빻은 가루를 수은에 섞으면 순도 높은 은만 건져낼 수 있는 기법이다.]이 개발되면서, 스페인의 은화가 물량으로 밀어 붙이며 기축 통화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때 스페인이 150년간 남미 지역에서 반출한 은의 양은 약 16,000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이었으며, 스페인의 페소는 17세기 후반까지 유럽 역내에서 국제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통용됐다. 상술한 오스만 제국의 인플레이션 역시 두카트화와 스페인 달러 사이의 관계가 뒤집힌 데서 기원하였다. 근세 아메리카 대륙의 은이 유럽으로 엄청난 유입되며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이러한 인플레이션은 오스만 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탈리아인 상인들과의 무역 과정에서 상당수의 은화가 오스만 제국으로 유입되고 이러한 은화 중에서는 악화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유럽과 다르게 산업 기반이 튼실하지 않았던 오스만 제국은 이러한 인플레이션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스페인에 의해 생산된 은화의 1/3 가량은 [[아카풀코]] 항구를 거쳐 [[필리핀 도독령]]이 있던 [[마닐라]]로 운송되었고, 다시 현지에서 화교 상인들이 몰래 밀수해 온 [[청화백자]] 구매 대금으로 사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명나라-누에바에스파냐 관계]] 문서 참조] 이러한 은화는 중국으로 유입되어 [[명나라]]의 경제와 재정을 이뤘다. [[일조편법]] 문서 참조 [[청나라]] 때는 이런 은이 기축통화 노릇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지정은제]] 문서 참조. 은화는 조선과 일본에서까지 유통되었다. 그러니까 근세까지 전세계에서는 은이 기축통화 노릇을 했다.[* 한국에서 돈을 세는 단위인 "냥"이라는 단위가 바로 청나라의 은화 단위다.] 조선의 인삼은 은으로 거래되어 중국에 팔렸으며, 조선의 후기부터는 조정의 재정도 곡식이 아니라 은화로 계산되었다. 중세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서양 각국은 중국에 엄청난 양의 은을 주고 [[차]], [[비단]], [[도자기]]를 구입했다. 그 규모는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유럽 각국에서 중국의 도자기 컬렉션이 처음 출현한 것도 이때이며, 각국의 왕실은 아예 벽이나 천장에 중국의 도자기를 박아 인테리어를 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유럽의 은은 중국으로 순유출되었고, 심한 시기에는 유럽발 중국행 선박의 90%가 대중국 결제 대금용 은괴를 선적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이 도자기를 독자 생산하게 된 18세기 초중반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결국 18세기 후반 들어 산업혁명의 선두주자이자 당시 유럽 최강국 중의 하나 였던 영국조차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은 유출 문제[*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영국 정부가 출자해 설립한 [[동인도 회사]]가 대중국 무역으로 천문학적인 부채를 일방적으로 얻게 되었고 이 회사의 출자자인 영국 정부가 그 부채의 이자 '일부'를 대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대납액이 당시 영국 본토 토지세 수입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 재정도 구조적 위기를 맞게 된다. 즉, 당시 영국 정부로서는 아편을 팔아서라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를 겪게 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문제의 돌파구를 인도산 아편에서 찾았고, 종국적으로는 [[아편전쟁]]을 불러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